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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그리움, 그리고 새로운 형상 미학의 창조

김영호(미술사가/중앙대학교 명예 교수)

I. 서언

김순겸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신념 아래 1980년대부터 '기억 너머-그리움'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며, 전통적 소재와 극사실주의 기법을 결합한 독자적 형상 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왔다. 김순겸의 작품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서정적 기억의 연출에 주안점을 두며, 이는 그의 작품이 지닌 특수성과 관객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평가된다. 이 글은 화가 김순겸의 예술 노정, 핵심 주제, 시그니처 모티프의 상징성, 기법과 화풍, 그리고 예술 의지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그의 예술적 위상과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기여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II. 예술 노정

김순겸(1959~)은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며 미술 교육자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대학 졸업 후인 1987년, 그는 제주에서 1년간 미술교사로 재직하였고, 이듬해인 1988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에서 교사 생활을 이어갔다. 이 시기는 그가 예술적 소양을 쌓고, 이후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2000년은 김순겸의 예술 노정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 해이다. 그는 교직을 떠나 전업 미술가의 길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결단은 ‘교사로, 작가로, 반쪽인생 같았다’는 그의 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술에 대한 완전한 헌신과 오랜 꿈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다. 전업 작가로의 전향은 단순한 직업 변경을 넘어선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깊은 몰입과 정체성 확립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결단은 그가 예술을 단순 취미나 부업이 아닌, 삶의 본질적인 천직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전업 선언은 그가 이후 '놋그릇'이라는 시그니처 모티프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정신적 몰입을 가능하게 했다.

기억너머-그리움-사랑의 향기
Acrylic on canvas
31.8×41cm
2007

김순겸은 199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꾸준히 작품을 선보여 왔다. 현재까지 총 18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또한 남부현대미술제, 광주현대미술제, 부산청년비엔날레, 제주미술제, 서울현대미술제 등 국내 주요 미술제와 이탈리아 현대미술초대전, 미국 로체스터시 초대전, 인도 국제교류전, 미국 뉴욕 BLOOMING초대전 등 다수의 국제전을 포함하여 200회 이상의 단체전 및 국제전에 출품하였다.

사회봉사 경력으로는 한국미술협회 시흥미술협회 고문, 그룹 터, 한라미술인 협회 회원 및 제주도립미술관 운영위원 등 미술계의 주요 직책을 맡으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경기도미술대전 심사위원, <아트공간 이아> 레지던시 프로그램 입주작가 심의위원, 제주청년작가전 작가선정 심의위원 등 다수의 미술 공모전 심사 경력을 통해 한국 미술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III. 핵심 주제

김순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기억 너머-그리움’이다. 이 주제는 작가 자신의 기억, 경험, 그리고 미래의 꿈이 머무는 세계, 즉 과거와 현재, 미래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다. 작가는 잊혀지거나 소홀히 다루어지는 주변의 것들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하며, 선택된 대상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만, 그 표현 의도는 단순한 대상의 재현을 넘어 의도적으로 연출된 기억의 서정성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는 그의 작품이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선 깊은 정서적 울림을 지니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기억너머-그리움
Acrylic on canvas
60.6×72.7cm
2002

김순겸의 예술 노정은 '기억 너머-그리움'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1990년대 작품에서 그는 전통적인 창문과 그 너머의 바깥 풍경을 배경 이미지로 사용하여 과거, 현재, 미래로의 소통을 창문 이미지로 상징했다. 필자는 이 시기의 작품에 대해 ‘창문을 통해 펼쳐지는 풍경이 눈(마음의 창)과 그림의 관계를 사유하는 대상으로 기능하며, 외부 세계와 내면의 영혼을 잇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다’고 분석한 바 있다. 작가에게 창문은 안과 밖,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작가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199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는 창문을 해체하여 비구상적으로 처리함으로써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분위기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는 대상을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주기보다는, 그 대상이 내포하는 정서와 의미에 집중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2000년 교직을 떠나 전업 미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 세계는 '놋그릇'을 중심으로 크게 달라졌다. 흥미롭게도 이 전환은 작가의 장모가 "그림 소품으로 써보라"고 주신 놋그릇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사람의 손때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오래된 놋그릇의 투박하지만 생생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 풍경, 창문, 길, 목련 등의 소재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마침내 놋그릇만 남게 되었다.

김순겸의 작품 소재가 1990년대의 '창문과 풍경'에서 2000년대 이후 '놋그릇'으로 전환된 것은 '기억 너머-그리움'이라는 주제를 더욱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창문이 외부 세계와의 소통과 확장된 해석의 시야를 의미했다면, 놋그릇은 훨씬 더 내밀하고 개인적이면서도 한국적인 특수 정서와 역사를 담는 소재가 된다. 놋그릇이라는 시그니처 모티프는 작가 개인의 그리움과 향수를 보편적인 한국인의 정서로 확장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는 비움의 철학에서 예술적 본성을 찾으려는 깊은 성찰의 결과이기도 하다.


IV. 시그니처 모티프의 상징성

김순겸의 예술 노정에서 놋그릇, 특히 방짜유기는 작가의 시그니처 모티프로 작동한다. 이는 청동기 시대 초기로부터 전해지는 우리 민족의 혼과 삶이 배인 유물로, 귀(貴)와 부(富)를 상징하며 인체에 해가 없고 물성을 변치 않게 보존하는 신비로운 그릇으로 알려져 있다. 김순겸의 작품 속 놋그릇은 한국인의 장인정신과 전통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풍요로움과 행복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기능한다.

작가는 캔버스에 놋그릇 하나를 거대한 크기로 확대하여 채워 넣고, 놋그릇의 물성을 강화하기 위해 표면의 질감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극사실적 묘사는 작가의 치밀한 묘사 능력과 더불어 작가 개인의 서사적 기억을 드러내는 한국 극사실 회화의 또 다른 진수를 보여준다. 놋그릇 표현에 있어 작가의 독특한 기법은 '손가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놋그릇의 표면과 질감을 표현하여 작품마다 다른 그릇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는 전통적 그릇을 만들던 장인의 손길을 연상케 하여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요소이자, 그의 작업의 독자성을 드러내는 핑거 페인팅이라 부를 표현법이라 할 수 있다.

김순겸의 작품 시리즈에는 때때로 그릇을 채운 물이 등장한다. 작가의 경우 놋그릇 안에 채워진 물은 생명과 풍요를 상징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물의 보편성은 놋그릇의 외부 표면에 그려진 물방울로 대체되고 있다. 극사실적 기법으로 묘사된 그릇 외부의 물방울과 그릇을 채운 물은 다르지 않은 상징적 기호들로 관객에게 생명과 풍요의 메시지이거나 나아가 정화와 순수의 의미이자 평안과 기원의 관념과도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기억너머-그리움-샘
Acrylic & Oil on canvas
72.7×60.0cm
2006

시간이 흐르면서 김순겸의 놋그릇이 담아내는 사물은 물에서 유채꽃으로 바뀌게 된다. 유채꽃은 그의 작품에서 물의 상징과 기법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생명과 풍요 그리고 행복과 평안의 기원을 의미하는 소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제주 출신인 작가에게 유채꽃은 작가의 작품 주제인 '기억 너머-그리움'을 표현하는 적합한 소재로 활용된다. 작가가 시도하는 유채꽃 표현의 특징은 강한 물성과 점묘를 활용한 추상성이다. 수없이 덧입혀지는 두터운 마티에르의 점들이 다양한 색상으로 반복적으로 구사되어 결국 노란색 유채꽃 느낌으로 완성된다. 이는 극사실적 묘사 속에 추상적 요소를 결합하는 작가의 독특한 화풍을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김순겸의 작품에 사용되는 바탕색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캔버스 바탕색은 주로 흰색, 노랑, 빨강, 검정, 파랑의 5가지 색상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한국의 전통 색상인 오방색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놋그릇이 드러내는 강한 단색 컬러에 현대성을 가미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오방색은 비단 방위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노란색은 풍요로운 대지를, 붉은색은 생명과 열정을, 푸른색은 창조와 성장을 상징한다. 이는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신념을 색채를 통해 구체화하는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오방색이라는 한국 고유의 색채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작품의 한국적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기억너머-그리움-서귀포유채
Acrylic & Oil on canvas
85.0×85.0cm
2018

V. 기법과 화풍

김순겸의 작품은 한국 극사실 회화의 계보를 따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사물 자체와 사물의 환영 사이에 발생하는 차별성을 인식하고 거기서 미적 감흥을 얻도록 관객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그의 표현 기법은 그의 작업에 단순한 대상의 묘사를 넘어선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작품이 한국 극사실 회화의 계보 속에서도 자신의 고유한 어법을 개발해 나가는 성취를 거두는 요인이라 생각된다.

그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영역에서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미국 하이퍼리얼리즘의 얼개를 벗어나 있다. 미국 하이퍼리얼리즘은 사진과 흡사한 정밀함과 이미지의 현상학적 존재감을 추구하지만, 한국 극사실 회화의 특수성은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진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기계적 복제와 차별화된다는 점을 창작의 원리로 받아드린다. 이러한 태도에서 한국 극사실 회화의 작가들은 인간의 시각과 표현의 한계를 시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기계적 묘사와는 다른 가상과 실재의 인식 문제에 관심을 더 기울인다. 한국 극사실 회화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물 자체보다 그것을 창조한 '화가'의 관점과 인식이다. 김순겸의 경우, 자신의 그림은 단순히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모사하는 것을 넘어 작가의 서정적 기억과 그리움의 표상물로 제시되기를 바란다.

2010년 이후 김순겸의 작품은 리얼리즘,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경향을 하나의 작품 안에 조화롭게 등장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놋그릇 안에 채워진 물의 이미지는 파장이나 반영을 과감하게 생략하여 하나의 색면으로 처리함으로써 상상의 공간을 확보하며, 배경 역시 삶의 공간이 아닌 캔버스의 바탕 자체로 남겨두고 거친 붓질의 흔적을 통해 회화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놋그릇이 있는 풍경이 아닌, 놋그릇이 만들어내는 환영적 이미지의 문제로 우리의 시지각을 안내하는 요소들이다. 유채꽃 표현에서 강한 질감과 점묘를 활용한 추상성을 보여주는 것 또한 이러한 통합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김순겸의 작품 제작 과정은 매우 많은 단계를 거치며 실험을 멈추지 않고 지속하고 있다. ‘파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긋다> 시리즈는 작가가 시도하는 조형 실험의 극단을 보여준다. 캔버스에 표상된 붓질의 기운과 물성 그리고 여백과 공간의 조응을 야기하는 긋기 시리즈는 김순겸의 작업이 실재와 가상, 존재와 허구, 그리고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범어 초현실주의 세계로 확장을 시도하는 열정의 결실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기억너머그리움-YOUCHAEFLOWER(한라산)
Acrylic & Oil on canvas
116.8×91.0cm
2024

VI. 결언 : 예술 의욕

김순겸의 예술 의욕은 "지키는 것이 실력이다"라는 작가 자신의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말은 단순히 한 가지 소재를 고수하는 것을 넘어선 다층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지킨다는 것은 예술가가 특정 소재나 기법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숙련을 통해 자신만의 독보적인 예술적 깊이와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는 신념을 나타낸다. 이는 그의 창문 풍경에서 정물 그리고 놋그릇에 이르는 작업이 실험을 통한 일관성과 치열한 연구와 반복적인 노력이 수반됨을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김순겸은 탄탄한 구상 능력을 바탕으로 작업하며,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담아내 관객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여 대중적 공감을 얻고 있다. 특히 그의 놋그릇 작업은 관객들에게 사물 자체와 사물의 환영 사이에 발생하는 차별성을 인식케 하면서 나아가 기억과 그리움이라는 미적 감흥을 선사해 준다. 캔버스 전체에 놋그릇 하나만을 거대한 크기로 확대하고, 놋그릇의 물성을 강화하며, 딱딱한 놋그릇 안에 부드러운 물 또는 유채꽃 이미지를 담아 상상의 공간을 확보하는 시각적 장치들을 사용하고 있다.

기억너머그리움-YOUCHAEFLOWER(미인도-인연)
Acrylic & Oil on canvas
162.2×112.1cm
2022

이상에서 보듯 화가 김순겸은 '기억 너머-그리움'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한국적 소재인 놋그릇과 유채꽃, 그리고 오방색을 통해 독창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극사실주의 기법을 바탕으로 하되, 단순한 재현을 넘어 추상성과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조화롭게 결합하며, 작가의 깊은 내면과 철학적 사유를 담아낸다. 특히 '지키는 것이 실력이다'라는 확고한 예술 의지는 그의 작품에 일관성과 깊이를 더하며, 한국 미술계에 대한 비판적 통찰과 실천적 제안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역할까지 확장하고 있다. 작가의 실험적 예술 의욕에 비추어 향후 그의 작품 노정이 펼쳐 낼 세계가 어떤 모습을 지닐지 사뭇 기대가 크다.

(2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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